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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묘비명은 무엇입니까?
포데로샤
2010. 12. 24. 22:38
당신의 묘비명은 무엇입니까?
나 떠난 후 묘비명(墓碑銘)에는 어떤 글이 새겨질까. 죽은 나는 말없이 누워있을 테지만 묘비명은 두고두고 내 곁에 서서 나를 찾은 이들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넬 것이다. 그들에게 뭐라 인사할 것인가, 나는 요즘 그 고민을 하고 있다.
햇살 쨍한 여름날 생뚱맞게 웬 암울한 소리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최근 나의 화두는 행복하게 죽는 것이다. '어떻게 죽느냐'는 문제는 결국 '어떻게 사느냐'는 문제로 귀결된다. 삶과 죽음은 반대말이 아니라 한 몸이기 때문이다.
묘비명은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짧은 기록이자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남기는 마지막 메시지다. 한 사람의 인생과 가치관이 응축되어 있기에 강한 여운을 남긴다.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하나만 남기라"며 스스로 생을 마감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비명은 '대통령 노무현' 여섯 글자다. 묘하게 권위적이지 않으면서도 숙연하게 가슴 속에 각인되는 글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묘비명은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이 없어라'이다. 생전 고인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는 성경 구절이다.
위트와 해학이 넘치는 묘비명도 있다. 걸레스님을 자처하며 기행을 반복했던 중광스님은 마지막 전시회 주제대로 '괜히 왔다 간다'고 묘비명을 썼다. 헤밍웨이의 묘비명은 '일어나지 못해서 미안해." 극작가 버나드 쇼는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고 묘비명을 남겼다. 익살스럽지만 가만히 음미해 보면 울림이 느껴진다.
얼마 전 어떤 분이 신문 칼럼에 '다 쓰고 간다. 후회 없다'고 묘비명을 남기겠노라 쓴 글을 읽고, 저런 생각을 가지면 참 아름답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옷깃을 여몄다. 하긴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지 않던가. 인생이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라는 소박한 진실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갓난아기의 배내옷과 죽은 이의 수의에 호주머니가 없는 것도 다 그런 연유 아니겠는가.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세상 떠날 때 지니는 것이라고는 똑같이 저승길 노자 한 닢이 전부인 것을. 쓰고 남은 것을 가치있게 베풀지 못하고, 더 갖기 위해 남의 불행에 눈 질끈 감아버리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고 비극적인가 말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작가 조세희는 말한다. "총탄이나 경찰 곤봉이나 주먹만이 폭력이 아니라 우리의 도시 한 귀퉁이에서 젖먹이 아이들이 굶주리는 것을 내버려 두는 것도 폭력이다"고. 30년 전에 출간된 이 책이 꾸준히 사랑받으며 100쇄를 돌파했을 때 작가는 영광스럽다는 말 대신에 "우리 사회가 변하지 않았다는 의미"라며 부끄럽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도 부끄러웠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외양은 화려해졌을지언정 내면의 성장은 더디거나 퇴보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 정(情)을 중시하는 민족이면서도 오히려 서구 국가들에 비해 기부문화와 봉사활동에 인색하다는 점은 너무나 이율배반적이지 않은가.
사회 지도층 인사의 국회 청문회 자리에서도 "왜 당신은 위장전입을 하고, 부동산 투기를 하고, 세금을 탈루했는가"라는 질문은 난무하지만 "지금까지 헌혈은 몇 번을 했고, 기부금은 얼마나 냈으며, 불우이웃을 위해 어떤 봉사를 하며 살아왔는가"하는 질문은 들어보기 힘들다.
어쩌면 우리는 지나치게 성공만을 위해 살아온 나머지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진 것은 아닌지 자성하게 된다.
평생 모은 재산을 기부하고 떠난 노점상 할머니, 불우이웃에 써달라며 이름없이 돈을 두고 가는 기부자들을 보면 사람들은 감동한다. 부모 없이 서럽게 사는 아이들이나 고단하게 늙어가는 노인들, 사랑하는 가족이 죽어 가는데도 돈이 없어 우는 사람들을 보면, 보는 이의 눈에서도 눈물이 난다. 도와주고 싶어진다. 정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 여유 생기면 도와야지 다짐하며 돌아서고 만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다음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고, 우리가 방치하는 사이에 우리 이웃은 인생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인간이란, 가치 있는 인생을 지향하면서도 오늘 당장 실천하지 못하고 내내 미루다가 결국 후회하게 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오늘 하루에 우리의 인생 전체가 담겨있는 건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버나드 쇼처럼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묘비명을 새기지 않도록 자그마한 것이라도 실천해보자고 다짐해본다.
김필식 대한적십자사 광주전남지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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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읽어본 글 중 나를 가장 감동시킨 명문이다.
나 떠난 후 묘비명(墓碑銘)에는 어떤 글이 새겨질까. 죽은 나는 말없이 누워있을 테지만 묘비명은 두고두고 내 곁에 서서 나를 찾은 이들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넬 것이다. 그들에게 뭐라 인사할 것인가, 나는 요즘 그 고민을 하고 있다.
햇살 쨍한 여름날 생뚱맞게 웬 암울한 소리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최근 나의 화두는 행복하게 죽는 것이다. '어떻게 죽느냐'는 문제는 결국 '어떻게 사느냐'는 문제로 귀결된다. 삶과 죽음은 반대말이 아니라 한 몸이기 때문이다.
묘비명은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짧은 기록이자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남기는 마지막 메시지다. 한 사람의 인생과 가치관이 응축되어 있기에 강한 여운을 남긴다.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하나만 남기라"며 스스로 생을 마감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비명은 '대통령 노무현' 여섯 글자다. 묘하게 권위적이지 않으면서도 숙연하게 가슴 속에 각인되는 글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묘비명은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이 없어라'이다. 생전 고인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는 성경 구절이다.
위트와 해학이 넘치는 묘비명도 있다. 걸레스님을 자처하며 기행을 반복했던 중광스님은 마지막 전시회 주제대로 '괜히 왔다 간다'고 묘비명을 썼다. 헤밍웨이의 묘비명은 '일어나지 못해서 미안해." 극작가 버나드 쇼는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고 묘비명을 남겼다. 익살스럽지만 가만히 음미해 보면 울림이 느껴진다.
얼마 전 어떤 분이 신문 칼럼에 '다 쓰고 간다. 후회 없다'고 묘비명을 남기겠노라 쓴 글을 읽고, 저런 생각을 가지면 참 아름답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옷깃을 여몄다. 하긴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지 않던가. 인생이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라는 소박한 진실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갓난아기의 배내옷과 죽은 이의 수의에 호주머니가 없는 것도 다 그런 연유 아니겠는가.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세상 떠날 때 지니는 것이라고는 똑같이 저승길 노자 한 닢이 전부인 것을. 쓰고 남은 것을 가치있게 베풀지 못하고, 더 갖기 위해 남의 불행에 눈 질끈 감아버리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고 비극적인가 말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작가 조세희는 말한다. "총탄이나 경찰 곤봉이나 주먹만이 폭력이 아니라 우리의 도시 한 귀퉁이에서 젖먹이 아이들이 굶주리는 것을 내버려 두는 것도 폭력이다"고. 30년 전에 출간된 이 책이 꾸준히 사랑받으며 100쇄를 돌파했을 때 작가는 영광스럽다는 말 대신에 "우리 사회가 변하지 않았다는 의미"라며 부끄럽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도 부끄러웠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외양은 화려해졌을지언정 내면의 성장은 더디거나 퇴보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 정(情)을 중시하는 민족이면서도 오히려 서구 국가들에 비해 기부문화와 봉사활동에 인색하다는 점은 너무나 이율배반적이지 않은가.
사회 지도층 인사의 국회 청문회 자리에서도 "왜 당신은 위장전입을 하고, 부동산 투기를 하고, 세금을 탈루했는가"라는 질문은 난무하지만 "지금까지 헌혈은 몇 번을 했고, 기부금은 얼마나 냈으며, 불우이웃을 위해 어떤 봉사를 하며 살아왔는가"하는 질문은 들어보기 힘들다.
어쩌면 우리는 지나치게 성공만을 위해 살아온 나머지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진 것은 아닌지 자성하게 된다.
평생 모은 재산을 기부하고 떠난 노점상 할머니, 불우이웃에 써달라며 이름없이 돈을 두고 가는 기부자들을 보면 사람들은 감동한다. 부모 없이 서럽게 사는 아이들이나 고단하게 늙어가는 노인들, 사랑하는 가족이 죽어 가는데도 돈이 없어 우는 사람들을 보면, 보는 이의 눈에서도 눈물이 난다. 도와주고 싶어진다. 정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 여유 생기면 도와야지 다짐하며 돌아서고 만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다음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고, 우리가 방치하는 사이에 우리 이웃은 인생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인간이란, 가치 있는 인생을 지향하면서도 오늘 당장 실천하지 못하고 내내 미루다가 결국 후회하게 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오늘 하루에 우리의 인생 전체가 담겨있는 건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버나드 쇼처럼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묘비명을 새기지 않도록 자그마한 것이라도 실천해보자고 다짐해본다.
김필식 대한적십자사 광주전남지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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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읽어본 글 중 나를 가장 감동시킨 명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