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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Cross (적십자)

좋아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어쩌면 적십자를 만나는 일은 산을 오르는 것과 닮았다. 그러나 산이라고 모두 같은 길을 따라서 오를 필요는 없다. 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을 따라 산으로 천천히 들어가서 머무르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된다. 그러다가 좋아지면 머무는 시간을 조금씩 길게 가져가면 된다. 그 즐거움에 푹 빠진 사람들은 아예 그 속에 집을 짓고 살려고 한다. 한번 적십자는 영원한 적십자라고 하면서.

자원봉사가 하고 싶은 사람은 자원봉사 참여를 통해서, 수영을 좋아하거나 안전에 대해 관심이 많다면 응급처치법, 심폐소생술, 수상안전법을 통해서, 이웃을 위해 자신의 일부를 나누고 싶다면 기부를 통해서,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헌혈을 통해서 적십자를 만날 수 있다.

또한 교내활동 외 청소년단체 활동에 관심이 많다면 청소년적십자(RCY)를 통해서, 전쟁으로 가족과 헤어졌다면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통해서, 몸이 아프다면 공공병원인 적십자병원 진료를 통해서 적십자를 만날 수 있다. 집에 화재가 났거나 재난을 당했거나 취약계층으로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적십자를 만날 가능성이 높다. 이밖에도 여기에 일일히 소개하지 못한 다양한 갈래길들이 존재한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헌혈을 하면서 적십자를 처음 만났다. 그때부터 기회가 되면 헌혈을 하려고 했다. 공익적인 활동이 좋아서 적십자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근무한 지 16년이 흘렀다. 아는만큼, 좋아하는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입사하고 적십자운동의 역사를 알게 되고부터 그동안 못 보고 지나쳤던 것들이 내 레이더에 선명하게 잡히기 시작했다. 무엇이 보였을까?

첫째, 일상에서 적십자표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역별로 다니다보면 적십자표장이 부착되어 있는 회사 건물, 헌혈버스, 차량들이 눈에 들어왔다. 도로변에 있는 병원과 약국의 간판, 군 앰뷸런스, 뉴스에 나오는 병원선에도 표장이 붙어 있었다. 심지어 게임 캐릭터에도 적십자 표장이 그려져 있었다. 이중 일부는 표장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사례이긴 했지만 말이다. <글 하단 : 오남용사례 참조>

둘째, 영화 속에서 적십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는데 서울택시기사인 배우 송강호가 광주택시기사인 유해진을 만났던 곳이 광주적십자병원이었다. 실제 광주적십자병원은 1980년 5월 당시 다른 병원이 문을 닫고 있을 때에도 의사와 간호사들이 철야근무를 하며 의료활동을 펼친 곳이었다. 재난을 다룬 영화에서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대형터널사고를 소재로 다룬 영화 <터널>, 최악의 바이러스 감염질환을 다룬 <감기>에서 적십자 구호품을 전달하는 장면이 나온다. 코로나가 끝나고 이를 소재로 한 영화가 언젠가 기록된다면 적십자가 어느 장면에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셋째, 책에서도 적십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스콧 피처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 "그녀는 내가 적십자로 가서 붕대를 만들 것이냐고 물었고"라는 대목에서 적십자를 찾았다. 한비야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와 최연혁 교수의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 스웨덴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꿈구는 대한민국을 만나다>에서도 적십자가 등장했다. 책에서는 헌혈이 소개되고 있었다. 이밖에도 내가 읽지 못한 수많은 책 속에 적십자는 숨겨져 있을 것이다.

넷째, 관광지에서도 적십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10여년쯤 전인가. 처가집 식구들과 관광차 설악산국립공원에 갔었다. 권금성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정상부근까지 걸어 올라갔더니 그곳에 적십자 산악구조대가 있었다. 제주도 이중섭미술관에 갔다가 화가의 생애를 쭉 읽어보는데, 그가 1956년 40세의 나이로 서대문에 있는 적십자병원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처럼 알게 모르게 적십자는 나의 일상 주변에서 자리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국내외를 불문하고. 밤새 돌아가는 보일러가 온기로 나에게 따뜻한 잠자리를 만들어 주듯이, 내가 미처 주목하거나 의식하지 못할 때에도 적십자는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적십자를 만났을 것이다. 그 중에는 나와 동일한 것을 본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더 많은 것을 보거나 아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알기 전에는 보이지 않지만, 알고나면 안 보일수가 없다. 난 여전히 새로운 적십자를 보게 될 때마다 기분이 좋다.

 

좋아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나의 적십자 다이어리 | 어쩌면 적십자를 만나는 일은 산을 오르는 것과 닮았다. 그러나 산이라고 모두 같은 길을 따라서 오를 필요는 없다. 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을 따라 산으로 천천히 들어가서 머무르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된다. 그러다가 좋아지면 머무는 시간을 조금씩 길게 가져가면 된다. 그 즐거움에 푹 빠진 사람들은 아예 그 속에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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