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에서 11월 24일자 토요판에 호모 아키비스트에 대한 기획기사를 냈다. <"내 삶도 역사 한 조각" 기록자가 된 보통사람들>이라는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고 내용도 내 관심사다. 기록하지 않으면 남는 게 없다. 우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고 있지 않는가. 그것이 당장 세상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는지 알 수 없고, 인류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지 피부로 느끼지 못하지만, 우리의 삶도 모두다 의미있는 이야기이고 역사의 한 조각이 될 수 있다.
기사를 잠깐 보자. 서울 도봉구청 평생학습관의 '시민 아키비스트 양성과정'을 이끌고 있는 북 큐레이터 안정희씨는 ----- "반드시 완결된 형태여야 하는 것이 아니고 아주 특별한 사연이 있어야 할 필요가 없어요. 진솔하게 쓴 후 기록물을 정리(아카이브)하는 일은 삶에 대한 성찰이면서, 세대 간 교류이기도 하죠. 귀한 옛 기록의 복원은 모두 일상의 기록에서 출발하잖아요. 기록되는 삶으로 우리 삶은 더 강건해지죠."
강내도서관에 가서 안정희 작가의 책 2권을 포함해 5권을 빌려왔다. 마음이 움직일 때 몸이 움직이듯, 괜찮은 기사하나 읽으니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르고, 더 알아보고 싶은 욕구가 충만해 진다.
올해로 직장생활 15년차다. 회사에서 장기근속 표창을 줬다. 지난 15년 직장을 통해 많은 일들을 경험했다. 그 일들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그저 한낫 혼자만 추억하는 일들로 끝날 것이다. 그래서 오로지 나의 관점에서 15년을 정리해 보고자 준비하고 있다. 이 일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마무리하고 싶다.
http://www.hankookilbo.com/News/Read/201811221519038531?did=DA&dtype=&dtypecode=
한국일보 김혜영 기자
[호모 아키비스트의 시대]
개인 삶 기록하는 교육 통해 지역의 생활ㆍ문화사 수집
“어르신 한 분의 생은 사전 한 권” 과거에서 뿌리 찾기
“앨범 사진이 사료 될 줄은” “기억 정리하며 치유 경험”
기억은 세월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 삶과 존재도 마찬가지다. 애써 기록하고 간수한 것만 예외다. 보통 숨 가쁜 일상을 물려놓고 기록, 분류, 보존에 공들일 수 있는 이는 대체로 권력자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왕의 기록이나 큰 흐름을 반추한 거시사(巨視史)만이 주로 후대에 전달되는 이유다. 미처 적고, 남길 겨를 없이 생계, 부양, 투쟁에 몰두하는 평범한 이들의 삶과 존재가 쉬이 흩어지고 사라지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반작용일까. 자성일까. 보통 사람들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생애사 집필, 생애구술사 채록, 옛 사진 공모, 수몰마을 생활사 기록, 시민 아키비스트(archivistㆍ기록활동가, 아카이빙 전문가) 양성 등. 전국이 뜨겁다. 각 지방자치단체나 문화재단이 시작한 시도들이 다양하다. 시민들을 교양강의와 공모전으로 초대하고, 이를 통해 왕의 역사에 가려 보이지 않던 이들의 일상사, 생활사, 문화사 등 미시사(微視史)를 복원한다.
최근 찾은 경북 안동시 화성동 경북유교문화회관 강의실에선 ‘제4기 경북 시민 아키비스트 양성 아카데미’ 수업이 한창이었다. 안동시와 경북기록문화연구원(이하 연구원)이 지난해 이 과정을 개설했다. 생애기록물을 완성하고, 이 중 아카이빙(archivingㆍ기록수집 및 정리)에 흥미를 느낀 시민이 지역의 미시사를 수집ㆍ기록하는 활동가로 뛰도록 하는 게 강의의 목표다. 토박이 공무원, 미국 이민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교수 부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대학생 등 다양한 참가자들이 저마다 기억 조각을 움켜쥐고 수업에 집중했다.
권윤대(59) 도산면장은 집 안 구석구석에서 찾아낸 사진을 꺼내 가만히 만졌다. 예안향교, 도산서원, 농암종택, 퇴계종택이 자리한 안동시 도산면에서 그는 나고 자랐다. 수도는커녕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마을이 천지개벽하는 동안, 그는 유년기와 39년의 공직생활을 통과했다.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모를 추억의 너울이 일렁였다.
“이건 첫애 태어났을 때고. 참, 이 병원은 이제 없어요. 이건 아내가 결혼 후 처음 친정에 가던 날 제가 쓴 편지. 요즘엔 이렇게는 안 쓸 테죠. 여긴 새마을운동이 한참일 때. 이건 천리천 옛날 모습이네. 이때는 공무원들이 매일 아침 나가 조기청소를 했거든요.”
사진으로 채 남기지 못한 기억들도 불려 나왔다. 친구들과 동태를 굴리며 놀다 동상에 걸린 발을 시원하게 하려고 몰래 콩 자루에 넣던 일, 재주 많은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이 힘을 모아 한옥을 짓던 날, 유일하게 쌀이 섞인 할아버지 밥상의 남은 음식을 차지하려 형, 누나들과 서로 다투던 저녁, 나룻배를 타고 첫 소풍을 가던 누나를 부러워하던 추억.
그는 “마을의 80세, 90세 어르신 한 분이 돌아가시면 민속박물관 하나가, 백과사전 한 권이 사라졌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라며 “내 기억도 한 번쯤 정리해두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시작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뜻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어려웠던 시절이라 아무리 뒤져도 시골집이 나오는 사진은 1980년대 뒤늦게 찍은 딱 한 장, 어머니와 둘이 찍은 사진도 한 장뿐이라는 게 유일한 아쉬움이다.
◇ 평범하고도 귀한 기억 조각들미처 기록되지 못했던 일상은 곳곳에서 찬찬히 표정을 드러냈다. 안동시 남문동에서 태어난 최호진(67) 포항공대 교수는 1975년 미국 이민을 갔다가 36년 만에 귀국한 지 몇 해 되지 않아 고향에서 생애사를 돌이키는 일이 새삼스러운 표정이다.
새끼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짚을 털어 여기서 나오는 쌀로 끼니를 때웠던 어린 시절을 꼼꼼히 돌이키기 위해, 그는 가족들에게 들은 한마디 한마디를 모조리 떠올리려 애쓰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자주 말하곤 했다. “동란(한국전쟁)을 피해 청도로, 대구로 피난 가던 그 난리 통에 기차 객실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 포대기를 살짝 열어 보면 너는 곤히 잘 자고 있었지.”
그가 반추한 기억 중 당대 상황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 적지 않다. 학교에 가고 싶다 조르는 탓에 한 해 일찍 입학했지만 성적이 나빠 어머니가 공공연히 학교에 와이로(わいろㆍ뇌물, 촌지를 뜻하는 일본어)를 넣느라 시험지 용지를 사다 지게로 실어 나르던 일, 1973년 10월 군 복무 중 실시된 국민투표 때 사령부 본부중대 300여명 중 반대표 2표가 나와 부대가 발칵 뒤집혔던 사건 등이다.
학부 졸업 후 주머니 속 120달러를 움켜쥐고 미국으로 향한 뒤 오하이오 주립대, BP사, 사우디 아람코 등에서 치열하게 때론 외롭게 통과한 시절을 한 편의 글로 정리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터. 그래도 최 교수는 행복한 표정이다. “대면하기조차 싫은 과거의 기록까지 끄집어내 모든 퍼즐 조각을 맞추면서 날지 못했던 애벌레가 비로소 나비의 삶을 펼쳐 보이는 기분입니다.”
이 강의를 신청하자고 먼저 제안한 아내 김은숙(65)씨는 “정말이지 치유가 된다”고 했다. 김씨는 오하이오 주립대 재학 시절, 최 교수와 만났다. ‘동양 여자애라 반가운데 경상도 사투리를 써서 더 예뻐 보였던’ 그였다. 김씨는 “25년 전 친구들과 각자 버킷리스트를 쓰면서부터 가족 아카이브를 만들어 두 아들에게 남기고 싶다고 생각했다”며 “고향 기억이 명확한 우리 부부와 달리 재미동포 2세, 3세들이 극심한 정체성 혼란을 겪는 것을 보면서 더 그런 마음이 절실했다”고 했다.
“이민 시절 교회에서 2세, 3세들을 대상으로 심리상담과 세미나를 해 오면서 어른들이 어떤 마을에서 뭘 보고 느끼며 어떻게 자랐고, 우리에게 어떤 정체성과 뿌리가 있는지를 상세히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하다 보니 스스로 너무 재밌어요. 모든 동년배 베이비부머들에게 이런 과정을 추천하고 싶을 정도로요.”
그의 기억에도 시대사는 흘러넘쳤다. 4ㆍ19 혁명의 단초가 되는 대구 학생 데모를 주도한 오빠와 학생들이 집에 숨어 지내던 일, 한국에서 앓았던 결핵 기록 탓에 남편이 일자리를 구한 사우디아라비아로 입국할 수 없어 곤욕을 치렀던 사건 등 기억이 생생했다. 그는 “가족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를 다 꺼내 놓으면서 다시 목소리를 내고 힘을 얻은 기분”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그의 기록을 읽으며 위로받을 것이다. 방황하는 이민 2세나 3세, 베이비부머, 누군가의 평범한 아내 등.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걸어왔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지난 발자취에서 답을 구하려는 사람들의 기억이 저마다의 책상에서 끝없이 쏟아졌다.
강사로 수업을 이끈 역사동화작가 정종영씨는 “평범한 개인의 생애사는 하나의 점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이런 점이 모여 선을 만들고 그 선이 여러 개 모여 이룬 면은 바로 공동체의 기억, 공유의 기억이 된다”며 “민간에도 좋은 기록이 많지만 단지 시민들은 이를 정리할 여유, 여력이 없을 뿐”이라고 했다. 생애사가 모여 결국 거대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채울 수 있다는 얘기이다.
◇ 가만히 있으면 사라지고 만다올해 2년 차를 맞은 이 수업을 처음 기획한 이들은 지역 언론인들이다. 기자 출신의 지역신문 발행인이기도 한 연구원의 유경상 이사장은 “개인 경험 탓에 민간 기록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생각했다”고 말했다.
“2013년, 안동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오래 일해 온 분의 책을 찾아다니다 끝내 실패한 일이 있어요. 25년간 혼자 발품 팔아 내성천이 흐르는 산과 도시들에 관해 쓴 책인데, 영세출판을 통해 발간한 후 시간이 흘러 저자조차 보관해둔 게 없었죠. 문득 돌아보니 이렇게 망실되고 있는 지역의 온갖 간행물, 팸플릿, 일기, 편지, 사진 등이 너무나 많았죠.”
공공기관의 기록은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보관하지만, 민간 기록은 어떻게 생성되고 사라지는지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흩어진 것도 모으면 자산이 된다는 생각에 여러 지역 기록을 수집해 디지털 아카이브로 구축하고 시민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해 보자는데 지역 언론인들, 선배들이 뜻을 모았습니다.”
의견을 접한 안동시에서 관련 연구용역을 진행했고, 아카이브 센터 등을 검토하면서 2016년 사단법인 형태의 연구원이 출범했다.
일단 시작은 했지만, 아카이브 사업에 대한 지역 어르신들의 첫 반응은 미지근했다. “내 일기가 뭐 볼 게 있어?” “창피한데 내 사진을 왜 복사해 가?” 등의 반응이 나왔다.
“시민 스스로 민간 기록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게 하려면 뭔가 교육이 필요하다고 느낀 거죠. 이런 참여 프로그램을 만들어 역량을 가진 활동가를 양성하면, 이분들이 나중에 지역사회로 흩어져서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지는 기억자료들을 수집하고 각 가족의, 선대의, 마을의, 지역사회의 역사를 제대로 복원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인 거죠.”
옛 사진 공모전도 이뤄졌다. 옛 사진을 달라는 요청에 시민 반응이 미지근하자, 연구원 운영위원들이 경로당 등을 일일이 다니며 노인들에게 부탁했다. 나룻배 타고 향토예비군 창단 첫 훈련을 떠나던 기념사진, 사라진 안동 옛 시가지가 담긴 사진 등이 장롱 속, 책꽂이에서 쏟아져 나왔다. 연구원의 백소애 운영위원은 “처음엔 쑥스러워 보여주기 싫다던 어르신들이 ‘아니 이런 것도 귀한 자료냐’고 신기해하며, 공모전 시상식에 온 가족이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올해 들어선 연구원 주최로 1976년 안동다목적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된 54개 마을 이주민 1만1,611명의 기억을 복원하는 사업이 시작됐다. ‘안동 수몰마을 생활사 기록화 사업’이다. “논문 몇 편 말고는 제대로 복원된 기억이 없어요. 마을만 잠긴 게 아니라 수몰민 입장에서는 600년 이상 선대가 지탱해온 집성촌 터전이 사라졌기 때문에 기억이나 정체성의 단절이 상당했어요.” 유 이사장은 80여명이 투입돼 연락이 닿는 주민들을 만나 면담 및 구술 채록을 했고, 사진 1,500여점을 수집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의미 있는 고문서도 발견됐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이 독립운동을 위해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떠날 때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족단명첩(家族團名帖)이 수몰민 출신 이종기(91) 할아버지 집안에서 우연히 나온 것이다. 집안 대표 66명의 명단, 석주 선생이 직접 쓴 결정 취지문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귀한 기록이다.
유 이사장은 누군가의 방 안에 갇혀 빛을 보지 못하는 개인의 기억이 밖으로 나오는 순간 역사의 작은 퍼즐 조각들이 하나둘 채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문중의 어느 장롱에서 이런 자료들이 망실되고 있을지 모르죠. 다들 지방 소멸을 이야기하고, 인구가 줄어 수많은 군 단위 기초자치단체들이 사라질 위기인데, 그 안에 녹아 있는 정신과 정체성까지 흩어지게 둘 순 없잖아요.”
◇ 기록으로 삶은 강건해진다이런 시도는 곳곳에서 싹트고 있다. 전국 각 지자체의 자서전 집필 프로그램, 마을지도 복원하기 사업 등이 대표적 사례다. 스스로 기록을 빚어낼 여력이 없는 이들을 위해서는 생애구술사 기록 작업이 활발하다. 생애구술사 작가 최현숙씨는 최근 수년간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할머니, 망원시장 상인들의 사연을 토대로 단행본을 발간해왔다. 스토리텔링이나 집필에 익숙하지 않은 노인, 상인들의 생생한 삶이 체계적 기록으로 정리됐다.
유사한 작업을 통해 올해만 해도 일제강점기 위안부 할머니들의 구술생애사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서다'(정진성 서울대 인권센터 교수 연구팀), 대구여성가족재단의 '대구여성생애구술사', 충북여성발전센터의 '충북여성생애구술사', 전북도립국악원의 '전북의 전통예인 구술사' 등이 발간됐다.
서울 도봉구청 평생학습관의 ‘시민 아키비스트 양성과정’을 이끌고 있는 북 큐레이터 안정희씨는 “자서전 쓰기가 기초적인 활동 같아 보여도 스스로 기록을 분류하고 폐기하는 등 삶의 가치를 되묻는 작업”이라며 “이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절박한 시도이기도 하다”고 조언했다.
“반드시 완결된 형태여야 하는 것이 아니고 아주 특별한 사연이 있어야 할 필요도 없어요. 진솔하게 쓴 후 기록물을 정리(아카이브)하는 일은 삶에 대한 성찰이면서, 세대 간 교류이기도 하죠. 귀한 옛 기록의 복원은 모두 일상의 기록에서 출발하잖아요. 기록되는 삶으로 우리 삶은 더 강건해지죠.”
평범한 기억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에 의해 귀하게 활용될 때까지, 더 많이 기록, 보존, 공개돼야 한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그냥 단지 개인이 잊고 살기 아까운 장면을 남기는 것만으로도, 후대는 그 너머의 의미를 읽어낼지 모른다는 얘기다.
당연한 듯 들려도 새삼스러운 말이다. 그저 그런 삶이라고 이 ‘기록 투쟁’에서 누락돼야 마땅할 이유는 없다는 얘기이다. 살아온 숱한 날이 아무것도 아닐 리 없다는 말. 그리하여 지금은 기록을 시작할 시간이다. 평범하되 소중한 그 시절이 저만치 사라지기 전에.
안동=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일상다반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계부어플을 1달 써 보니 달라지는 것 (0) | 2018.11.30 |
---|---|
주말단상 (0) | 2018.11.25 |
지난 한 주 (0) | 2018.10.28 |
저녁이 있는 삶과 알람이 없는 삶 (0) | 2018.10.15 |
내 책 한 권 세상에 내 놓을 수 있다면.. (0) | 2018.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