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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통이와 함께하는 세상

명필은 몰라도 악필은 아니겠군

 

"상~가 토~지"

차 뒷자리에 앉아 있던 딸아이가 아파트 부동산 간판에 적힌 글씨를 하나씩 읽었다. 그걸 보면서 한글을 뗄 날이 멀지 않았음을 예감한다. 막 터진 꽃봉오리처럼 아이의 언어도 마구 트이는 중이다.

지켜보니 아이는 한글 읽기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쓰기도 재미있어했다.

계속 무언가를 쓰고 그리려고 하길래 아이에게 빈 노트를 하나 줬다. 얼마 지나니 새로운 노트를 하나 더 달라고 해서 또 줬다. (그렇다고 노트를 다 쓴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나씩 줬더니 내가 가지고 있던 노트가 바닥났다.

하루는 아이가 방에 오더니 "아빠 나 이 수첩 가지면 안 돼?" 하는 것이 아닌가. 본인 딴에는 아빠가 쓰는 다이어리가 크기도 아담해서 예뻐 보였나 보다. 웬만하면 주겠는데 이건 아빠의 메모장이고 계속 쓰고 있어서 대신 아이가 좋아할 만한 캐릭터 다이어리를 사 줬다.

아이는 새 수첩을 마음에 들어했다. 잠잘 때도 머리맡에 놓고 잠을 잤다. 그리고 아이는 수첩에다 아는 글자를 하나씩 적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아이 수첩을 살짝 펼쳐 보았는데, 그 속에 알록달록하게 쓴 글씨들이 여러 장에 걸쳐 보였다.

아이의 글씨를 보니 내 기분이 순식간에 좋아졌다. 아이의 글씨체가 예뻐 보였기 때문이다. 명필은 몰라도 악필은 아니겠군. 글자도 적당히 크고, 적당히 간격에, 흘려 쓰지 않은 또박또박 글씨라서 좋았다.

나도 자라면서 글씨를 괜찮게 쓴다는 얘기를 더러 들었다. 내 글씨는 그냥 반듯한 글씨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손글씨를 잘 쓰셔서 그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내심 딸아이의 손글씨가 좋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이번에 딸아이의 글씨를 보니 아직은 어리지만 나름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다.

사람은 각자 자기만의 글씨체가 있다.

어떤 사람은 덩치는 산만한데 글씨는 깨알 같이 쓰고, 어떤 사람은 체격은 작은데 글씨를 대범하게 크게 쓴다. 글씨와 글씨 사이의 간격이 일정한 사람이 있고, 듬성듬성 불규칙한 않은 사람이 있다. 글씨가 앞으로 쏠리는 사람이 있고, 글씨가 뒤로 넘어가는 사람이 있다. 남녀의 글씨도 다르다. 그리고 그때그때마다의 컨디션에 따라 글씨는 달라지기도 한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존재하듯이, 세상에 똑같은 글씨는 없다. 그 사람의 성격과 성장환경이 고스란히 밖으로 표출되는 게 글씨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아이의 글씨는 수없이 많이 바뀔 것이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아이가 자기만의 글씨체를 잘 만들어가면 좋겠다. 그리고 그 글씨체로 좋은 생각을 담은 글을 많이 쓴다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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