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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름, 산 이름

죽은 자들이 산 자처럼 거리를 활보한다. 중국영화의 강시처럼 시체가 관 뚜껑을 열고 나온 것이 아니다. 영화 <식스 센스>나 <디 아더스>처럼 산 자와 죽은 자가 뒤집히는 극적인 반전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이미 죽었으나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멀쩡하게 넥타이 매고 출퇴근을 하는 이들이 있다. 김혜순 시인의 ‘죽은 줄도 모르고’라는 시다.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황급히 일어난다/ 텅 빈 가슴 위에/ 점잖게 넥타이를 매고/ 메마른 머리칼에/ 반듯하게 기름을 바르고/ 구더기들이 기어나오는 내장 속에/ 우유를 쏟아붓고/ 죽은 발가죽 위에/ 소가죽 구두를 씌우고/ 묘비들이 즐비한 거리를/ 바람처럼 내달린다.” 도시 직장인의 아침 풍경이다. 여느 날처럼 그는 서둘러 일어나 간단히 요기하고 쫓기듯 직장으로 내달린다. 그러나 그는 이미 죽었다. 가슴은 텅 비었고 내장은 썩었다. 죽은 줄도 모르고 하루일을 마친 그는 집에 돌아와 다시 잠에 들며 ‘관 뚜껑’을 덮는다. 시인의 눈에는 죽은 이가, 죽은 도시에서, 죽은 삶을 살아가지만 정작 본인은 모른다.

몸은 살아 있으나 이름은 이미 죽은 이들도 있다. 제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는 이들이 그렇다. 그들의 이름은 그간의 삶을 부정하는 의미로 쓰인다. 명예는 증발하고 경멸과 조소의 의미로 불린다면 그 이름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들은 왕년의 추억만을 고집하고 있다. 이미 껍데기가 돼버린 이름을 묘비처럼 부둥켜안은 채.

프로야구 선수 송진우가 ‘송진우’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은퇴했다. 최고령 투수인 그는 “내 이름에 걸맞은 피칭을 할 수 없다”며 은퇴를 결심했다고 한다. 더이상 이름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그는 깨끗하게 마운드를 떠났다. ‘회장님’으로 불리며 팬들의 사랑을 받던 그다운 마무리이다. 송진우의 투수 생명은 끝났어도 ‘투수 송진우’라는 이름은 두고두고 살아 남을 것이다.

떠날 때를 아는 이는 흔치 않다. 떠날 때를 놓치면 살아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다. 촛불재판 간여로 대법관으로서는 최초로 징계받은 이도 그런 경우다. 동료와 선후배가 용퇴를 촉구했을 때, 사법부가 휘청거렸을 때 그의 이름은 이미 죽었다. 그런데도 그는 오늘도 멀쩡히 넥타이를 매고 근무하고 있다. 죽은 줄도 모르고.

<이 글은 경향신문 여적에서 가져왔다. 김태관 논설위원이 쓴 글인데, 이분의 글 개인적으로 새겨볼 게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