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시인을 만나면? 몇자 몇줄 되지 않는 짧은 글귀도 시인이 말하고 적으면 뜻깊고 새롭다. 감탄이 절로 난다. 시인이라도 누구나 그럴까? 아닐껄.
고은 시인의 <순간의 꽃>을 읽었다. 내가 시를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읽어서 이해되고 느낌까지 온다면 그 시는 나에게 의미깊은 시인거지. 오늘 내가 읽은 시는 일상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통찰 같았다. 낯익은 지명도 반가웠다.
서운산, 공도우체국, 안성읍내 5일장
안성 사람이 아니라면 잘 알지 못할 일들. 시인의 발걸음을 머리속으로 상상해 본다.
이 책이 나온 때가 2001년 4월 이었구나. 이때 나는 대학을 휴학하고 안성에 있다가 서울로 떠났다. 3월에 공도 대림동산에 있는 주유소에서 주유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지만 주유소 앞 버스정류장에 한 노신사가 청바지에 파란색 셔츠에 넥타이에 자켓을 입고 서울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나이들어도 캐주얼한 차림이 멋스럽구나 속으로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고은시인이었다. 시인은 이때 이 시집을 내기 위해 출판사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린 것인지도 모른다.
무욕(無慾)만한 탐욕(貪慾) 없습니다.
그것말고
강호 제군의
고만고만한 욕망
그것들이
자 건배
-p 80-
욕망이 지나치다고 알았는데, 무욕도 탐욕이란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욕심이 있는 법. 받아들이란 말씀이신가. 그것이 평범한 자들속에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이겠지.
자연만한 노동이
어디 있는가
오늘 나는
밭 한 뙈기 씨를 뿌렸다
자연이 싹을 틔우리라 무럭무럭 길러내리라
결국 사람이란 얌얌 얌체일밖에
-p 81-
농사는 사람이 짓는 거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땅이 키우고 하늘이 키우고 바람이 키우고 비가 키운다. 자연이 없다면 농사란 먹을거리란 애시당초 불가능한 것일뿐.
겸허함이여
항구에 돌아오는 배
오만함이여
항구를 떠나는 배
- p 101-
자세의 문제다. 마음의 문제다. 항구를 떠날때 겸허할 줄 알고, 돌아올 때 만선의 기쁨을 누린다면 한결 행복하겠지. 자연은 인간이 오만하면 언제든 뒤짚어 엎는다. 인간은 자연을 극복할 수 없다. 혈기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 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같은 문제 다른 인생.
잠언같은 시 구절에 푹 빠져 하루를 보냈다. 따뜻한 물에 발 담그고 족욕하며 아무 간섭도 받지 않고 책을 읽고 감상을 남긴다. 나이가 들면 생각도 늙고 글도 늙는다는데, 시인은 언제나 뜨겁고 낭만적이다. 그래서? 좋다.
'책읽는 거북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바람 / 고은 / 창작과 비평사 (0) | 2012.01.31 |
---|---|
책은 도끼다 / 박웅현 / 북하우스 (0) | 2012.01.26 |
삶을 바꾼 만남 / 정민 / 문학동네 (0) | 2012.01.12 |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이현우 / 자음과 모음 (0) | 2011.12.16 |
지금은 없는 이야기 / 최규석 우화 (0) | 2011.12.04 |